• Admin

부재의 현실

2019년 1월 5일 업데이트됨

부재가 얼마나 휑한 말인지 실감하지 못했다. 이제 보니 부재도 어느 실존 못지 않게 당당히 엄연한 현실이다. 스물 다섯 살 아들을 잃은 어느 철학 교수는 “아들을 위한 애가”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누군가 내게 ‘당신은 누구입니까? 자신에 대해 말해 보십시오’라고 묻는다면, 나는 간단히 대답할 것이다. ‘나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입니다.’”


세상에 다 좋은 일도 없고 다 나쁜 일도 없어서, 내 딸의 죽음을 통해서 부활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는 사람도 있고,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되었다는 사람이 있어서 감사하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인류를 위한 대속적인 죽음인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죽음도 그리스도를 닮아서 누군가에게 대속적인 죽음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치장인 셈이다.


그렇다고 해도 아픔은 변함 없이 그만큼의 아픔이다. 자식의 죽음을 앞세운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도 이 아픔을 그 부피만큼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 예내 자리에 자기 자식의 이름을 대입하여 얻는 공감은 충분히 유효하지 않다. 어떤 것도 그 상실에 대한 보상일 수 없다. 나는 욥이 열 자녀를 잃고 재산을 다 날린 뒤에 하나님께서 그를 회복시키며 더 많은 재산과 다시 열 자녀를 주신 것을 복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다시 얻은 딸이 예뻤다는 것이 이전 못난 딸에 대한 보상일 수 있을까. 오히려 예의 그 철학자 니콜라스 월터스코프의 말이 가슴을 친다. “언제나 한 사람이 모자라는 이 황폐한 땅에서 내가 어떻게 축제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중에도 나는 고은의 싯귀를 생각하며 꾸역꾸역 하루 세 끼를 먹고 상실이 주는 유익을 누리려고 한다. “미안하다.나 같은 것이 살아서 오일장 국밥을 사 먹는다.” 이래도 되나 싶게 누릴 것을 누리며, 비슷한 나이의 자식을 잃은 그 그리스도인처럼 “눈물이 고인 눈으로 세상을 보리라. 그러면 이전에 마른 눈으로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되리라.” 더러 눈물이 고이는 것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더 이상 슬퍼하지는 않으리라.

조회 33회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

담임목사 쪽글 읽기

페이스북에 짧은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읽기 원하시는 분들은 페북 Bong Huh를 찾아 읽으시기 바랍니다.

Mother's Day에 붙여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어머니가 없었으면 이만한 세상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해 보니, 모계사회가 백 번 옳고 자연스럽다. 사랑하는 사람이 품어 다스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크리스마스는 마냥 메리하지 않다.

동방박사 세 사람이 먼 길 여행 끝에 예루살렘에 당도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도발적인 질문에 헤롯왕이 뒤집어졌고, 예루살렘이 소동했다. 헤롯이 성경에 정통하다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 물었다.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헤롯은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났다는 이가 이스라엘이 목을 길게 빼놓고 기다리는 그리스도인 줄을 알았다. 예수 탄생의 의

​찬양교회  Praise Presbyterian Church

732-805-4050

office.ppc@gmail.com

15 Cedar Grove LaneSomerset, NJ 08873 USA

life_logo_edited.png
TBP_logo_blue_edited.png
holy%20bible_edited.png

Copyright © Praise Presbyterian Chu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