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가 얼마나 휑한 말인지 실감하지 못했다. 이제 보니 부재도 어느 실존 못지 않게 당당히 엄연한 현실이다. 스물 다섯 살 아들을 잃은 어느 철학 교수는 “아들을 위한 애가”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누군가 내게 ‘당신은 누구입니까? 자신에 대해 말해 보십시오’라고 묻는다면, 나는 간단히 대답할 것이다. ‘나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입니다.’”
세상에 다 좋은 일도 없고 다 나쁜 일도 없어서, 내 딸의 죽음을 통해서 부활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는 사람도 있고,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되었다는 사람이 있어서 감사하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인류를 위한 대속적인 죽음인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죽음도 그리스도를 닮아서 누군가에게 대속적인 죽음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치장인 셈이다.
그렇다고 해도 아픔은 변함 없이 그만큼의 아픔이다. 자식의 죽음을 앞세운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도 이 아픔을 그 부피만큼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 예내 자리에 자기 자식의 이름을 대입하여 얻는 공감은 충분히 유효하지 않다. 어떤 것도 그 상실에 대한 보상일 수 없다. 나는 욥이 열 자녀를 잃고 재산을 다 날린 뒤에 하나님께서 그를 회복시키며 더 많은 재산과 다시 열 자녀를 주신 것을 복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다시 얻은 딸이 예뻤다는 것이 이전 못난 딸에 대한 보상일 수 있을까. 오히려 예의 그 철학자 니콜라스 월터스코프의 말이 가슴을 친다. “언제나 한 사람이 모자라는 이 황폐한 땅에서 내가 어떻게 축제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중에도 나는 고은의 싯귀를 생각하며 꾸역꾸역 하루 세 끼를 먹고 상실이 주는 유익을 누리려고 한다. “미안하다.나 같은 것이 살아서 오일장 국밥을 사 먹는다.” 이래도 되나 싶게 누릴 것을 누리며, 비슷한 나이의 자식을 잃은 그 그리스도인처럼 “눈물이 고인 눈으로 세상을 보리라. 그러면 이전에 마른 눈으로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되리라.” 더러 눈물이 고이는 것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더 이상 슬퍼하지는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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