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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애
2021년 6월 04일
In 교우나눔터
럿거스 1학년 남학생입니다. 올해 8월부터 내년 5월까지 거주할 방을 찾습니다. 아시는 분이나 정보가 있으시면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연락처: 973-932-2005 Mrs.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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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애
2020년 3월 29일
In 교우나눔터
같은 공간에서 살면서도 반대 방향을 보고도 살 수 있었다. 같은 방향의 공기를 숨쉬지 않아도 대화를 주고 받을 수 있었다. 빠쁜 시간을 핑계대며 눈을 마주치 않아도 괜찮았다. 사방의 위험에서 서로를 보호하고 같은 공기만 공유하게 되었다. 그 사람의 얼굴과 표정과 그 사람의 마음과 손동작을 보게 되었다. 얼마사이에 이렇게 주름진 피부와 검게 그을린 사이로 드리운 그림자를 쫓기는 시간과 삶의 질주를 핑계로 한번도 들여다보지 않은 세월이 너무 길었다. 정원에 핀 꽃과 나무만 보살피며 키우지 말고 집안에 있는 나의 꽃과 사랑을 가꾸자. 교회 생활만 계획하고 실행하지 말고 내 마음속 신앙도 체계를 세워 자라도록 하자. 억지로 주어진 우리 삶의 제동에 시간과 공간의 주님을 다시 느끼자. 주님의 숨결아래 주님을 숨쉬며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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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애
2020년 2월 07일
In 교우나눔터
자다 깨어 문득 떠오른 단어 ‘한숨’ 왜 우리는 ‘한숨 자다’라는 표현과 ‘한숨을 쉬다’라는 단어를 같이 쓰는가. 여기저기 찾아보니 두 단어는 동음이어가 아니고 다의어란다. 같은 어원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고 전혀 다른 형태의 단어가 우연히 같은 모양을 취하고 다른상황이지만 같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숨 잔다’의 ‘한’은 하나라는 뜻이고 ‘한숨 쉬다’의 ‘한’은 크다는 뜻이란다. 그럼에도 난 왜 그 단어가 같은 의미로 다가오는지, 우리가 한숨을 자고 나면 깊은 한숨을 한번 들이마신 것 같지 않은가. 나이가 들면서 쉬어지는 한숨은 그것으로 많은 것을 떨쳐버리고 잠깐 쉬는 시간인 것 같다. 삶의 연결고리에서 살짝 벗어나 고리를 풀고 지나가는 순간인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한숨이 늘어감은 그 한숨의 한숨으로 삶의 아픔을 떨쳐버릴 수 있는 짦은 시간의 한숨의 낮잠같이 한숨의 인생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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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애
2019년 11월 14일
In 교우나눔터
우리는 이사를 와서 어떤 이가 버리고 간 목욕탕을 개업하기로 하였다. 조그마한 욕조가 하나인 그곳을 남편과 함께 말끔히 닦아 마치 새 욕조처럼 만들어 놓고 우리는 매우 행복했다. 아무리 더운 여름도 남편은 땀을 뻘뻘 흘리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시원한 새 물로 갈아주며 흐뭇해 했다. 퇴근하는 남편에게 오늘은 얼마나 많은 아름답고 귀여운 손님들이 왔었는지 재잘거리며, 찍은 사진이나 비데오를 보여주곤 하였다. 정말 희한하게도 한 욕조에 한 손님씩 차례데로 들어가는 것과, 일단 여기저기를 살피며 수줍게 욕조 가장자리에 앉았다가는 어느 순간에 온몸을 풍덩 빠뜨리고 몸 전체를 떨며 목욕을 해댄다. 그리고는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다른 손님에게 양보하는 듯 가버린다. 파란색, 갈색, 그리고 아주 빨간색의 형형색색의 그들은 움직임도 몸짓도 다 다르고 신기하였다. 우리는 그 손님들을 보며 웃음을 멈추지 못한다. “저 손님은 돈을 2배로 받아야 할 것 같아 너무 뚱뚱해서” “저 손님은 돈 받기 미안하네, 너무 왜소한 체구라서” “저 손님은 혼자서 너무 독차지하며 오래하는데 퇴장시킬까?” 생각 같아서는 그들의 이름과 주소를 일일이 적고 들여보내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었기에 너무 안타까왔다. 그들에게 ‘다시 또 오세요’라는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서비스는 시원하고 깨끗한 물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갈아주고, 방해하지 않는 조용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 전부였다. 가을이 되니 낙엽이 물위를 덮기 시작했고, 드디어 수면이 얼었다. 손님은 더 이상 오지 않았고 우리는 당분간은 휴업을 해야 할 것 같다. 다시 내년 봄이 되면 새 단장하고 손님을 맞이해야 할 것 같다. 서로를 향해 지저귀며 날라다니던 형형색색의 새들이 어딘가로 가버리는 겨울. 이 겨울을 잘 지내야 아름다운 봄이 올 것이다. 업소를 새로 단장하여 더 많은 새들이 날아들 수 있는 방법을 골똘히 생각해본다. 이 겨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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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애
2019년 6월 22일
In 교우나눔터
10여년전에 돌아가신 시어머님은 시아버님이 어떤 분이셨는가를 물으면 한결같이 이렇게 답하셨다. “나에게는 과분한 남편이셨지.” 유행가 가사에 “그대는 나에게는 사치” 라는 구절이 나온다. 기막힌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를 대입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영어 표현에 ‘You deserve it.” 이라는 문장을 나는 무척 좋아한다. 내가 어떤 것에 부합된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것에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의미이다. 사실 우리 인간은 주님의 눈에는 어떤 것도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어여쁘게 후하게 여겨주심에 그런 자격을 부여하신 것임을 생각한다. 내가 다른이에게 어떤 존재의 가치로 얼마나 절실한 필요와 배려를 하며 사는지 목사님 말씀데로 남에게 풍성한 삶의 근거지가 되는지 나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할 일이다. 내가 이런 사랑 받을 짓을 하고 사는지 그렇지 않음에도 나를 포용하며 사는 사람 곁에서 이런 사치를 누리고 사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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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애
2019년 3월 31일
In 교우나눔터
70~80년 한생을 살면서 우리는 몇번이나 다시 태어나는가 갑자기 나를 돌아보고 삶을 다지어 새로운 인성으로 돌변하는 것 사랑하는 사람의 감화로 변하여 새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중병중에 건강을 되찾아 병상에서 훌훌 털고 일어나게 되는 것 오랫동안의 병상을 이기고 건강을 되찾아 기뻐하시는 분을 뵈었다. 다시 주신 주님의 축복에 감사하며 많은 사람들과 함께 그 순간을 축하했다. 아내분이 운전하며 며칠을 울며 다니셨다고, 그 수많은 세월을 같이 살아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삶은 다함이 없다. 남의 죽음 앞에는 위로도 해주고 주님곁으로 갔으니 다행이라는 말을 할 수 있으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 허공의 문장이 되어 버리는 것은 나에게는 적용이 되지 않는 위로이기 때문이다. 다시 건강을 되찾으신 그분의 생이 정말로 아름답고 찬란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이 주신 특은과 축복을 주님에게 돌리며 타인과 나눌줄 아시는 따뜻한 마음이 두 부부의 사랑이 끊임없이 피어나는 굴뚝사이로 주님의 사랑도 같이 태워지는 냄새가 진동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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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애
2019년 3월 09일
In 교우나눔터
1980년 어떤 중매쟁이에 의해 나는 남편을 만났다. 별로 나를 잘 알지 못하는 그분에 의해 남편을 만났고, 만난 후에야 남편의 집과 우리집은 이미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깊은 교류가 있는 집안임을 알게 되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사장이라는 말의 라틴어는 <폰티펙스>라고 하며 ‘다리 놓는 사람’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결국 중매자의 역할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는 사람들을 서로 연결하여 어떤 지점에 이르게 하는 역할이니. 주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그 엄청난 중매의 역할은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임무였고 그 결과로 우리는 지금 이렇게 어엿한 가정을 꾸미고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처음에는 아무 연고도 없는듯 하신 주님이 우리를 이끌고 가신 그곳에 가보니 이미 나의 이름과 나의 탄생을 예견하시고 준비하셨던 것이다. 남편과 나는 과거를 되짚어 보면 나의 어린시절 친척들의 사진에 돌아가신 시아버님 사진도 들어있고, 친정엄마를 시어머님이 어린시절 무릎위에 놓고 봐주기도 하셨다는 것이다. 외할머니는 남편과 선을 보고 난 후 서둘러 무조건 시집을 가라고 등을 떠다 밀다시피 하셨다. 그 집안을 잘 알고 남편을 어린시절 보신적이 있었기에. 할머니의 선택은 전적으로 옳았고, 주님의 열성과 사랑으로 결혼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는 확신은 살면서 새록새록 느낀다. 중매자이신 주님의 권유와 조언과 이끌림에 귀 귀울이고 따라가고자 한다. 언제나 멋진 결과를 가져다주신 주님의 선택과 결정을 우리는 철떡같이 믿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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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애
2019년 1월 20일
In 교우나눔터
우리는 언제 어떻게 주님을 만나는가? 아니 만났던 경험이 있었는가? 이런 질문에 언제 주님이 우리를 떠나신 적이 있나요? 라고 묻던 소녀가 있었다니. 항상 내옆에 계시는 주님을 모르고 반대방향으로 헤매고 다니는 나를 본다. 돌아서서 주님을 향해 가면 되는데. 그 방향이라는 것이 내가 가는 방향도 모르는데 반대방향을 어찌 알고 찾겠는가 우리는 그래서 기도라는 것으로 예배와 찬양이라는 것으로 우리의 후각, 시각 그리고 청각을 키워서 주님을 향한 방향을 찾아야 하나보다. 세상 모든 냄새와 소리에 그렇게 민감한 나는 주님이 부르시는 목소리 주님의 옷깃에서 나는 향내 그것에는 너무 무뎌 답답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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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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